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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뉴스] 비극의 “우키시마호 폭침” 영화제작 본격진행 화제, (주)쇼비즈엔터그룹 과 (주)에스오WT 영화공동제작 협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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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4 16:15:00

 

비극의 “우키시마호 폭침” 영화제작 본격진행 화제

(주)쇼비즈엔터그룹 과 (주)에스오WT 영화공동제작 협약식

전 세계 10억 명과 1:1 대화한다?…'스마트포털' 후원

지난 1일 오후12시 (주)에스오WT 본사에서 곽영진 회장 과 (주)쇼비즈엔터그룹 앙드레 정 회장 및 양사의 임직원 과 함께 “우키시마호 폭침” 영화공동 제작을 위해 본격적인 계약체결 과 함께 협약식 을 마처다.

상대편 휴대폰 번호를 내 폰에 등록하지 않아도 전 세계 모든 사람들과 1:1대화가 가능한 어플을 개발하여 출시되었다.(주)에스오WT가 개발한 '스마트포털'이 바로 그 주인공. 스마트포털이란 스마트폰용 개인포털사이트를 의미한다. 도메인비, 제작비, 가입비 등이 일체필요 없는 스마트폰용 무료홈피다. 

스마트포털 로 개발 출시된 전자명함은 평생사용료가 어풀 다운로드 구매요금은 1만원이다.

우키시마호 푹침 영화제작 어풀 전자명함을 구입하면, 1만원의 애국 이란 슬로건으로 모든 수익금은 영화제작 비로 사용되며, 영화제작홍보가 함께 시작된다.

설치하는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스마트포털은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우키시마호 폭침 영화제작'을 검색 후 어플을 다운 받으면 된다.본인의 스마트포털 내에 있는 시,구,동 소통방을 통해 본인의 거주지역 주민들과도 소통할 수 있고 수십 만 가지(현재) 각종 소통방을 통해 단체소통과 1:1소통이 가능한 어플이다.향후 본인의 스마트포털 검색창에 LA소통방, LA힐튼호텔소통방, 치약소통방 등 수백 만 가지 각종 소통방을 검색한 후 소통방 전체회원들과 그룹소통은 물론 1:1대화도 할수 있다.

 

그리고 스마트포털은 "인터넷 실명제"를 추구한다. 본인의 스마트포털 내에 있는 수십 만 가지 각종 소통 방에 글 작성한 사람의 홈피로 이동하는데 단 1초면 가능하다.따라서 악성댓글을 적거나 성인물 등 불법적인 광고 등은 즉시 삭제조치하며 정도에 따라서 곧바로 홈페이지가 차단될 수도 있기 때문에 선한 댓글달기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또한 본인의 스마트포털 내에 있는 퀵서비스, 택배, 포장이사, 꽃 배달, 쌀 배달, 도배장판 등 각종 생활서비스를 주문신청 하는데 단 5초면 가능하기 때문에 편리하다.회사 유통수익의 60%~최고 100%를 본인의 홈페이지에 포인트로 적립을 시켜주기 때문에 경제관념이 있는 분들은 반드시 만들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 중이다.에스오WT 곽영진 회장은 "온라인상의 본인 집짓기 프로그램이 언젠가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 예측해 9년 전부터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개발하게 됐다"는 개발 동기를 밝혔다.이어 "오랜 기간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만큼 이 사이트의 완성도는 매우 높다"며 오는 7월 에 그랜드 오픈과 함께 1년 이내 국내회원 1천만 명 목표를 달성하고 30개국 이상 10억 명을 목표로 오픈 준비 중 이라고 포부를 밝힌바 있다.

“우키시마호 푹침 영화제작” 후원기금 전자명함 어풀 은 11월 20일부터 판매가 시작되며, 대한민국 범시민 참여 캠페인으로 홍보 또한 함께 이루어진다.

 

 

한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개요는 (浮島丸爆沈事件 槪要)

1945년 8월15일 일왕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 가 포츠담선언에 굴복하고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한반도는 그 지독했던 일제의 식민지시대가 끝나고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았다. 한반도 삼천리강산은 차치물론하고라도 일본 본토와 전쟁터로 강제연행되었던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에 넘쳐 그 감개무량함이란 이루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 때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서 광복을 맞이한 조선인의 수가 9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한국인에게는 대본영 해군성의 지령과 전쟁터에서 한국인을 으레 죽여 왔던 일본군이 직접 자행한『조선인섬멸작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조선인섬멸작전』의 통제권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의 총지휘권을 쥔 우가키(宇垣完彌)였고, 우가키는 대본영의 해군성 지령에 따른 것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결국 오미나토항에서 우키시마호 출항지령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 사령관인 우가키(宇垣完彌) 해군 중장이 내렸고, 당시 사령관 차석이었던 참모장 가노메젠스케(鹿目善輔) 해군소장은 우키시마호가 출항하기 전에 도쿄로 출장 가 있어 오미나토에는 없었다. 따라서 업무의 책임서열은 우가키에 이어 주석참모인 나카다 시게모토(永田茂元) 해군대좌이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8월9일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이때 일본군은 사할린에서부터 홋카이도와 일본본토를 향해 진군해 내려오는 소련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소련군 가운데 황색인종이 다수 있어 이를 한국인이 소련군 스파이로서 안내를 맡고 있다고 단정하고 한국인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일왕의 항복 방송이 대본영에서 흘러나간 뒤에 퇴각하던 일본 해군들이 저지른 사할린 가미시스카경찰서 화염학살과 미즈호항 냉동학살 그리고 마이즈루만 수장학살로 이어진 잔인무도한 학살만행인《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70년이 지난 지금도 원형그대로 남아있다.『조선인섬멸작전 』지령을 받은 오미나토해군경비부 사령관 우가키와 우키시마호 함장 도리우미 가네오(鳥海金吾)는 부하들과 함께 3일 동안 한국인을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그리고 하루 밤낮을 이유도 밝히지 아니한 채 바다위에 띄워뒀다가 8월22일 밤 10시가 돼서야 오미나토 앞바다인 무츠만을 빠져 나섰다.

이 우키시마호는 일본 해군 특설함대로 대본영의 지령에 따라 홋카이도 하코다테항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오가며 군수품 수송과 츠가루해협의 제공권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사진자료제공) - (주)쇼비즈엔터그룹

▲①선명(船名): 우키시마호(浮島丸) ②선주(船主): 오사카상선 대표

(大阪商船 代表) ③제조(製造): 미츠이타마시마 조선소(三井玉島造船所)

④제조일(製造日): 1937년 3월15일(1937年3月15日)

⑤선종(船種): 화객병용(貨客倂用) ⑥총톤수(總t噸數): 4,730톤(四千七百三十噸)

⑦길이(長): 108.43미터(108.43m) ⑧선박번호(船舶番号): 42601

⑨계약양식(契約樣式): 1(一) ⑩징발년월일(徵發年月日): 1941년 9월 3일(1941年9月3日)

⑪용도별(用途別): 포함<대형>(砲艦<大>)⑫소관(所管): 요코스카해군경비부(橫須賀海軍警備部) 

 

(사진자료제공) - (주)쇼비즈엔터그룹

▲①침몰 지점: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마이즈루만 해상 헤비지마와

도리시마 사이 시모사바가 전방 3백미터. ②침몰일시: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

③침몰원인: 한국과 일본 양측의 주장이 엇갈림.

 

이 배는 일제 패망 직후 시모키타반도에 있는 “조선인 송환”이라는 마지막 임무를 띠는듯하였으나 사실은 인간학살선이었다. 일본의 북방지역 사할린과 치시마열도, 북해도의 산간 도로공사장과 탄광 그리고 남태평양 전선에서 으레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리고 학살해 온 것처럼 말이다. 일본 본토의 북방지역인 사할린이나 치시마열도,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시모키타반도의 군사시설 노역장은 더 없이 참혹했고 고문과 치사가 다반사였다. 이런 점으로 광복을 맞은 한국인들은 우키시마호를 타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를 타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소위 한국인 귀국선 우키시마호에는 9천2백명 이상의 한국인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초기에서 일제 패전 직전까지 시모키타반도와 그 주변지역 해군전용비행장등의 군사시설에 투입되었던 징용・징병 노동자, 자유노동자, 일반노무자, 가족생활자들이다. 이 배는 오미나토항을 떠나 부산항으로 입항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었으나 애초부터 부산을 향하는 직항로를 택하지 아니하고 일본 본토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교토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서서 멈춰선 뒤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마스트만 남기고 선체 모두 바다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면서 8천여 명의 한국인이 죽었다.

 

그 날이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 20분쯤이었다. 이 사건의 핵심인 침몰원인과 사망자 수는 70년이 지난 2016년 현재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관련자료를 공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공할 자료조차도 남기지 아니하고 폐기했거나 소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측의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와 북측의 조선 일본군《위안부》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그리고 일본의 교토조선인역사조사회와 도쿄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2003년 9월 평양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사건의 진상과 제반 결론을 공유한 바 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알려면 사건의 발상지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서 벌어진 한국인 수난사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한국인 강제연행자 수와 강제노동 실태, 군사시설 규모, 군사시설에 참여한 토목건축업체와 일본통운 등의 현황, 각 해군비행장에 투입한 조선인 수, 각 해군부대에 투입한 한국인 수, 8월15일 이후에 홋카이도에서 오미나토로 이동한 한국인 수, 가족생활자 수가 파악되어야 승선자 수를 알 수 있다. 또한 사할린에서 퇴각하던 해군의 비정상적인 행동, 출항의 부당성, 마이즈루만 돌연 회항, 해군의 모선 사전 탈출, 갑작스런 굉음, 구조 태만, 사망자수 축소・조작, GHQ의 조사방기, 9년간 선체 수중방치로 인한 사체유기, 67년 동안 외면해 온 일본 정부의 태도 등을 알아야 비로소 우키시마호 사건을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은 한일협정이나 그 어떤 창구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우키시마호사건 원고단』이 교토지방재판소에 제소한 재판의 판결이 피해자와 유족을 거듭 우롱했다.

이 사건의 전반적인 문제를 간추리면서 승선자수를 추산해 보면, 미사와비행장 해군11, 12, 13, 14부대에 투입한 인원, 가바야마비행장에서 일한 10개 중대 규모 인원, 해군23부대에서 일한 인원, 2개 국영기업체와 11개 민간토건업체에서 일한 인원 등으로도 승선자수가 9천2백여 명에 육박한다. 출항에 앞서 페인트를 칠해 배 이름을 지웠고, 기관실 옆 창고에 자폭장치를 부착했다는 증언이 오미나토 해군공작부 조기과에 근무하던 보일러공이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8월21일 승선을 완료하고 22일 오후 10시에 출항했다. 무츠만을 빠져 나온 우키시마호는 애초부터 부산항을 향하지 아니하고 일본 본토 해안선을 따라 남하했다. 해군승무원 대부분이 양주에 취해 있었고, 자신들의 소지품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승무원들은 한국인들에게 “너희들이 오늘을 무사히 넘기면 이 물건을 주는 것이 어찌 아깝겠는가!” “가다가 적을 만나면 싸워야 한다. 뒤에 폭탄도 많이 실었다.”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겠구나!” “이 배는 가다가 어디론가 들어간다.”는 등의 언행을 서슴없이 죄다 토해냈다.

 

(사진자료제공) - (주)쇼비즈엔터그룹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선체를 조사할 때 배의 안쪽 밑바닥이 부서진

파편으로 엉켜있는 모습. 이 사진은 타무라씨가 사진기를 주머니에 넣고 몰래 찍은

사진을 오사카 국제신문이 공개했다. 조사자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9년 전 선실 안에서 죽어있을 조선인의 유해를 감안하여

조일우호협회가 유해의 원형을 보존할 것을 건의했으나

배를 인양한 이노사루베지 측은 배를 다시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인양했다.

이로써 9년 전 희생당한 조선인들은 또 다시 다이나마이트 폭탄 세례를 맞았다.

(마이즈루 우키시마호진상구명회 회장 리병만 제공)

(사진자료제공) - (주)쇼비즈엔터그룹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찍은 사진. 선체 벽 부분의 철판이

밖으로 휘어져 있어 내부 폭발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증이다.

(마이즈루우키시마호사건진상구명회 회장 리병만 제공) 

(사진자료제공) - (주)쇼비즈엔터그룹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건져 올린 유해.

9년 동안 해저에 유기되어 두개골과 굵은 뼈만 남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전 직후 사할린에서부터 퇴각하던 일본 해군들이

자행한 조선인 학살사건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으로 항진해 들어갈 때 이미 소해완료라는 신호를 받고 입항했다. 이 배는 처음부터 부두 접안을 시도하지 아니하고 헤비지마와 도리시마 사이 해상에서 멈춰 섰다. 배가 멈춘 뒤에 해군승무원들은 구명보트를 내려 타고 모선을 탈출했다. 해군승무원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뒤에 폭발소리가 났고 곧이어 두 번째 폭발음이 났고 배는 가운데부터 꺾이면서 침몰했다.

 

일부 승무원들은 갑판위에서 한국인을 구조하였다기보다 오히려 사람이 매달려 있는 로프를 칼로 잘라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임시로 설치한 나무사다리가 부러져 선실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나오지 못하고 용솟음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바다는 온통 중유로 덮였고, 뱃기름을 뒤집어 쓴 사람들은 눈만 뒤룩거리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인근 어촌마을에서 거룻배를 몰고 구조에 나섰으나 그 배마저 뒤집힐까 하여 물에 빠진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피하면서 겨우 구조했다. 살아난 사람들은 밤길을 걸어 마이즈루 평해병단에 임시 수용되었다. 그 날 밤 임시수용소 2층에서 또 한 번의 미증유의 폭발이 일어나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이즈루 바닷가로 가족을 찾아 나섰으나 시신이 뱃기름으로 덮여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어 가족을 찾지 못했다.

이 때 해군들은 시신을 밧줄로 줄줄이 엮어 바닷가에 묶어 맺다. 마을 사람들은 긴 장대와 갈퀴를 들고 나와 바다에 떠있는 가방과 보따리를 끌어내 속에 든 돈을 챙겼다. 그들은 비겁하게 부자가 되어 마을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으므로 고향을 떠난것으로 밝혀졌다. 참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비극적인 참사였다. 이 같은 대참사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침몰원인을 조작했고 사망자수를 축소 발표했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조사・분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침몰원인으로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닿아 폭발・침몰했다고 발표했지만 촉뢰가 아니라는 과학적 논리가 성립된다. 기뢰는 감응기뢰, 음향기뢰, 부유기뢰라는 성상과 기전으로 폭발한다. 감응기뢰는 수압이나 직접접촉으로 폭발하고 음향기뢰는 기관소리 즉 음파의 세기로 폭발하고 부유기뢰는 수중에 떠 있으면서 부딪쳐 폭발한다.

 

우키시마호가 폭파되어 침몰할 때는 배가 완전히 멈춰 서 있었기 때문에 위 세 성상 기뢰는 폭발 기전에 맞지 않는다. 마이즈루만에 미군이 투하한 기뢰가 다수 있었다고는 인정되지만, 배가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2백25명의 해군승무원이 구명보트를 타고 모선을 다 빠져 나간 뒤에 “촉뢰”란 있을 수 없다. 배가 멈춘 상태에서는 수압이 작용하지 않고, 기관소리도 없고, 직접 접촉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부딪쳤다는 근거가 없으며 선체 파괴상태로 보아도 선체 내부에서 폭발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조선인 일본헌병 미나미는 마이즈루에 당도했을 때 기관실 쪽으로 늘어선 전기줄을 발견하고 이를 끊으려 했으나 도구가 없어서 끊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촉뢰가 아닌 폭발물에 의한 폭파침몰이다.

 

두 번째로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사망자 수가 터무니없이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가라앉은 배의 선실에 몇 명의 조선인이 숨죽이고 있었을까? 이는 감출 수 없는 자연현상 그대로였지만 GHQ도 사건 은폐에 합류했다. 배를 인양하지 아니하고 사망자를 524명으로 발표한 점, 도리우미 함장이 GHQ에 사망자를 260명이라고 축소・조작하여 보고한 점,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인양하여 조사하지 아니하고 일주일만에 사건을 종결한 점, 재일조선인연맹이 제소한 소를 정당한 이유 없이 기각한 점 등은 모두 가해국 일본과 GHQ가 국제사회에서 불리해 질 수 있는 정황이었으므로 은폐했다. 이 문제는 미국이 전후처리 과정에서 패전국인 일본과 발가벗고 동침한데서 확연히 드러났다.

 

대형전범인 미치노미야 히로히토를 사형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후처리의 부당성은 피해자의 인권을 짓밟았다는 점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침몰원인 조작과 사후처리 부당성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첫번째 문제는 침몰한 배를 즉시 인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선실 안에는 죽은 사람이 몇 명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양조사도 아니하고 사망자 수를 발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 번째는 다음 날 바닷가에 밀려든 시신을 신원 파악 없이 밧줄로 줄줄이 엮어 맺고, 기름을 붓고 태워 산골짜기에 무단 매립했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특히 주목해야 할 만행은 9년 뒤에 해저에 가라앉은 선체를 인양하고자 할 때 일본・조선우호협회에서 유골을 원형 그대로 인양할 수 있는 방법을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선체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여 인양했다.

 

이 같은 처사는 또 다시 사망자의 인권을 짓밟은 것이며, 사망자 수를 완전히 무시한 행위였다. 그나마 인양한 유해로서 남녀노소를 구별할 수 있었으나 이 또한 무시하고 유해를 합쳐 태워 9년 전에 524명이라 발표한 숫자 맞추기에 급급했다. 또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두 눈을 딱 감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교만한 태도가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당시 시모키타반도 일대와 가마부세산 요새화, 가바야마비행장, 미사와비행장, 오마철도, 오미나토항만 등의 공사와 군수물자 상하역과 운송 등이 모두 전쟁수단이었으며, 이 공사장에 조선인 9천명을 투입하라고 했으며, 1945년 8월초까지 조선인을 강제연행하여 이 지역에 투입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침몰 당시 살아나온 생존자들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강제연행에서 강제노동 그리고 우키시마호 폭파 침몰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으며 피해자들은 원고단을 구성하여 교토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어느 분은 네 번째 끌려갔고, 어느 분은 홋카이도에서 일하다가 형제가 노동현장에서 만나기도 했다. 마이즈루만 사건 현장에서 남편, 아내, 자식, 어머니, 누나, 언니, 동생, 삼촌을 잃었다. 마이즈루 바다에서는 물을 담은 바가지에 개미를 한 움큼 넣은 것처럼 바글거리며 죽어갔다고 했다. 당시 해군승무원도 사건 자체를 시인했으며 한일 양국 정부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모키타반도 군사시설 공사현장에서 일한 조선인 수와 우키시마호 승선자 수와 마이즈루만 사건 현장 사망자 수는 서로 삼각함수 관계이다. 8월15일까지 일한 노무자 수가 정해지면 승선자 수가 정해지고 승선자 수가 정해지면 사망자 수를 추산할 수 있다. 그러나 지옥의 삼각함수는 온데간데없이 일본 정부의 교만과 잔인함과 야만으로 지금도 풍화되고 있다. 하여튼 우키시마호를 폭파 침몰시키는 수법으로 된『조선인섬멸작전』이 대본영의 지시냐 아니면 오미나토해군경비부의 소행이냐 아니면 퇴각하던 항명파 해군들의 일왕에 대한 맹종성 난동이냐를 분명하게 따져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 일본정부가 책임을 회피・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키시마호는 참혹하게 침몰당한 뒤 6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목적지였던 부산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참상과 일본의 침략전쟁이 빚어낸『조선인섬멸작전』인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이다. 이 사건의 책임 소재는 가해국인 일본이 가장 원천적인 책임이 있다. 한국 정부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1965년 한일기본협정에 거론되지 않았으므로 그 뒤로 진상을 규명하여 해결해야 했으나 그러하지 아니한 책임이 있다. 미국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미국은 연합군총사령부의 사령관 맥아더와 함께 초특급전범 히로히토를 살려야 했기 때문에 난징대학살, 경신년간도대참살, 731부대인간생체실험,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 일본군성노예종군위안부, 아시아대규모약탈, 민간인대량계획학살등을 조사・제소하지 않았던 바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사건이 바로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이다.■

 

현제, 희생자추모협회가 2012년부터 매년 8월 24일 부산에서 희생자(8000명)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영화의 제작 배경은 전재진 원작가를 통하여, 아시아를 향한영화, 2차대전과 같은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영화, 일본 제국주의를 종식시키는 영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인류에 전쟁의 아품을 통해 평화의 메세지를 전 세계에 감동으로 전달을 목표로 한 블록버스트급 영화로 제작된다. (영화촬영지는 한국,중국,등 아시아 전역의 2차대전 피해국 나라를 전반적 으로한 스케일로 국제적 로케이션 장소로 촬영된다.)

 

또한, 독도 및 위안부문제와 함께 우키시마호폭침의 일제강점기 왜곡된 역사진상규명의 대일청산 국책사업에 접근하는 중대한 내공을 갖는 작품으로써, 8,000여 영령들을 위한 진혼과 위령을 위한 엄숙한 추모의 작품영화 이기도 하다.

본영화의 제작 감독으로는 김진홍 감독(2015“제23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신인 영화감독상 수상)이 선정되어 함께 제작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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